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의 과거와 현재

2010/08/27 03:55
글쓰기의 변화

 2009년부터 마이크로 블로깅 서비스는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특히 마이크로 블로깅 서비스에서 사유의 정리가 간단하다는 측면과 모바일, 그리고 웹을 통한 생각의 공유가 기존 방식보다 편하다는 장점 때문에 미디어의 롱테일의 테일 부분이 마이크로 블로깅과 같이 사유의 정리가 편하고 접근성(순수한 접근성의 의미)이 높은 서비스쪽으로 이동하는 추세였다.
 2010년이 되어 한국에 본격적으로 스마트폰과 같은 모바일 디바이스가 보급되면서 자신의 사유를 남기기가 쉬워졌다. 공유하고 싶은 생각이 있을 때, 그 생각을 곧바로 모바일로 웹에 포스팅하면 곧바로 자기와 가까운 사람들끼리의 Interaction이 빠르게 일어난다. 2009년 우후죽순 생겨난 SNS는 이른바 트위터와 같은 마이크로 블로깅 시스템과, 페이스북과 비슷한 서비스들로 나뉘어져 2010년 들어서는 트위터와 페이스북만 웹의 주요 SNS가 되어버리는 극단적인 모습이 되어버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지만 현재 SNS의 두 측면이라고 보여지는 트위터와 페이스북은 성향이 다르다. 트위터는 거대한 이야기풀에 가깝고, 페이스북은 평소 가까운 사람들(오프라인 인맥)을 통한 온라인에서의 확장이다.
 아까전에 언급하듯이, 지금 테일에 가까운 일반인들의 기록 및 사유는 SNS로 이동하고 있다. "Social"이라는 매력적인 측면도 존재하나, Contents Container와 같은 블로그는 블로그끼리의 연결이 솔직히 유명무실하다. 굳이 댓글 알림이와 같은 한 논점에 대한 Feedback은 컨텐츠 소비자가 그 블로그에 접속해야 일어나는 이벤트에 의존적이다. 이에 반해 현재 SNS가 가진 장점이 빠른 컨텐츠 생산과 소비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고정된 플랫폼에서 올라오는 컨텐츠에 대한 생산과 소비가 한꺼번에 이루어진다. 여기에 API를 활용한 모바일 어플리케이션 또한 컨텐츠 생산 소비의 간편함에 일조하면서, SNS가 나오기 전까지의 상황과 비교해보면 매우 편해졌다.
 SNS 보급 이전만 하더라도, 컨텐츠를 소비하기 위해서는 특정 블로거를 RSS 추가하거나 메타 서비스에 접속해서 메타 사이트가 전면적으로 보여주는 컨텐츠 중심으로 소비해 나갔다. 메타 서비스가 가진 문제는 롱테일의 테일을 전면에 보여주지 못했다. 오히려 파레토의 법칙을 잘 따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아이러니컬하다. 블로그가 나온 초창기에 따르면 블로그는 기존 언론과는 다른 롱테일형 서비스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어느 누구나 article을 쓸 수 있었고, 이슈 메이커로서의 기능을 다했다. 초창기의 메타 서비스 또한 다양한 사람들의 글을 노출시킴으로서 다양한 컨텐츠들이 보급될 수 있는 환경에 가까웠다.(초기 올블로그와 이올린만 하더라도) 하지만 블로고스피어 미디어도 점점 파레토의 법칙을 따르게 되었다. 메타에서 보여지는 글들이 '이슈' 중심의 Article들이 넘쳐나기 시작했고 이는 곧 일상과 같은 테일류의 컨텐츠들이 메타에서 감추어지게 된 것이다.
 SNS와 같이 생산과 소비가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플랫폼에 경우에는 단지 그 플랫폼에만 적응을 해버리면 그 때부터는 이야기를 나눌 다른 사람만 찾으면 되는 것이다. 트위터의 같은 경우에는 Following 방식을, 그리고 페이스북의 경우에는 친구 추가와 같은 방식으로 말이다. 단지 생산만 하면 이미 관계가 맺어져 있는 'Social Circle' 안에서는 최소한 소비가 이루어진다. 메타에 보내서 이슈화가 되지 않는 이상 Feedback이 잘 이루어지지가 않는 블로그보다는 컨텐츠의 소비가 쉽게 이루어졌기 때문일까. 그래서 기존 미디어의 상당수의 테일이 SNS로 몰리고 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는 현상이기도 한걸까.


블로그의 현재와 미래

 누군가는 "블로그도 Timeline을 가진 Log가 아닌가?"라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단일 플랫폼으로 컨텐츠를 타임라인으로 생산, 소비를 할 수 있는 환경에서는 컨텐츠에 대한 접근과 소비가 쉬워질 수 밖에 없다. 블로그의 경우에는 각 블로그가 하나의 플랫폼이고, 각각의 생각을 대변한다. 그래서 생산은 쉬울지는 몰라도 소비가 쉽지가 않은 경우가 많다. 이제 '생각' 이라는 논점에서 생각해 볼 때, 'Social Circle'을 다르게 표현하면, '표현, 성향'이 같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SNS가 이슈 메이커의 기능을 할 수는 있으나, 자기의 서클 안에서만 논의를 하다보면 생각이 갖히게 될 수도 있다. 내가 신뢰를 하는 사람의 대화인 만큼, 더욱 쉽게 끌려가는 경향도 있다. 물론 내부의 비판적인 시선이 항상 존재할 수 있으나. 개별적 성향이 강한 블로그와는 다를 수 밖에 없는 본질적인 성향이 존재한다.
 블로그는 기존의 매스미디어와 다른 새로운 성향의 개인 미디어로서 성장해왔고, 웹에서의 주류 미디어로서의 입지를 굳혀나가고 있는 것 같다. 다만 기존 블로그의 테일이 SNS로 자꾸 이동하고 있는 만큼, 블로그라는 서비스도 이제 과거를 되돌아보고, 이슈 메이커(혹은 오피니언 리더)의 꾸준한 성장을 지원하고, 기존 테일을 어떻게 다시 블로그라는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서비스로 불러들일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해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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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서 중립지키기

2010/03/28 18:07
Im in ur Internets
Im in ur Internets by JasonWalton 저작자 표시
'블로그에서 중립을 지킬 필요는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해서는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일반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글을 쓰기 위한 입장에서는 중립을 지켜야 함이 일반적이다. 어떤 무언가를 반박하고 비판하기 위해서라도, 어떤것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라도, 중간자적 자세는 중요하다.
어떤 가치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한쪽의 시각에서 들여다보는 것은 위험하다. 이것은 비단 신문과 같은 매스미디어에서만 적용되는 기준이 아니다. 개인 미디어에서도 기준이란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한쪽의 입장에서 강요(혹은 주장)은 전혀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강압적인 느낌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블로그에 정치적 이슈에 관해서 어떠한 인물이 나왔을 때, 비판을 하기위해 호칭을 바꾸는 수단(?)을 쓰기도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반대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비판을 위해서라면 깎아 내리는 대신, 완곡한 표현으로 바꾸는게 나을 듯하다. 항상 글을 쓸 때에는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글을 써야한다는 것이 생각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래서 중립을 지켜야 하는게 아닐까 싶다. 그만큼 중립에는 정치적 중립, 의견적 중립 그런것이 아닌, 그 이상의 뜻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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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속의 커뮤니티

2010/03/28 14:59
Tweetie - Twitter Client for Mac
Tweetie - Twitter Client for Mac by Steve Keys 저작자 표시

본인은 트위터를 본격적으로 사용한 지는 맥을 쓰기 시작할 때부터였을 것이다. 트위티 클라이언트가 마음에 들었고, 정보를 전달한다는 트위터의 특성을 알기 때문이다. 트위터를 사용하다 보면, 우리가 알고있는 대규모의 정보전달은 크게 잘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들 사이에서의 관심있는 정보들이 follow 된 사람들끼리 흘러간다. 그 외에는 보통 사람들은 트위터로 일상을 기록하고 있다. 물론 트위터를 사용하는 방법은 다양하며, 또한 트위터는 어느 하나로 정의되는 매체는 아니다.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을 충실히 행하고, 오직 그것밖에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트위터를 이용하면서 일상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 하며, 소통을 행한다. 또한 의견도 '전달'의 형식으로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는 트위터는 각 트윗에 사용된 언어를 알아듣는 사람들끼리는 지역구분선이 없다.
Inutile Cancello
Inutile Cancello by padesig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하지만 이 글에서 다루고 싶은것은 보통 정보 소통에 관해서는 지역의 구분선은 나타나지는 않지만, 사람은 소통하는 과정에서 실제로도 만나고 싶어하는 그러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온라인상에서 나타나지 않던 구분선은, 지역이라는 실체로 오프라인에서 나타난다. 각 지역모임은 이런 점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지역이라는 한계와 트위터를 사용하는 사람들끼리의 만나고 싶어하는 사회적 행동에 대해 나온 산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지역화는 곧 커뮤니티화이다. 트위터는 개인화가 강한 소셜미디어 매체이나, 실은 사람들이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뭉치고 그리고 그 속에서 교류하는 특성이 강한 한국인인 만큼, 트위터에서도 이러한 커뮤니티화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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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함의 미학, 트위터와 미투데이

2009/12/31 16:29

140자로 표현하는 간단한 형식의 트위터

 전세계 사회에서는 트위터 열풍이 가시질 않았다. 간단한 인터페이스에 일방통행 같은 소통구조는 개인주의에 걸맞게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정보'라는 재화를 빠르게, 그리고 유동성 있게 140자 이내의 단문으로 보내주는 트위터의 매력은 많은 기업가나 관리자들에게 관심이 대상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트위터의 국내적인 수용은 어떠할까. 대부분 언론에서 트위터를 조명하며 관심을 띄우곤 하지만, 트위터를 제대로 쓰기 위해서, 그리고 트위터를 이용한 쌍방향 실시간 정보 소통이 가능하게 하려면 그에 대한 디바이스나 국내적인 정서에도 뒷받침 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사실인데, 이는 디바이스와 같은 외부적 환경도 마찬가지였지만, '수용'이라는 내부적인 요소가 더 큰 것이 사실이다. 우리나라 웹은 '카페', '커뮤니티'와 같은 울타리식 미디어에서 성장해왔다. 그리고 웹 2.0을 겪으면서 개인화 된 미디어인 블로그, SNS, 그리고 이런 개인화 된 디바이스(스마트폰)의 대중적 보급까지, 집단에서 개인화로 옮겨가는 과정 중에 있는 것은 사실이나, 아직도 '교류'라는 SNS 본연의 목적에 맞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개인의 일방적인 이야기를 표현하는 것만이 아닌, 그 이야기를 평소에 알고 있던 사람과 풀어나가길 좋아하는 것이다. 이런 요구 아래 미투데이가 나온 것 같은게 아닌가 싶다. 
150자로 표현해나가는 미투데이의 미학
 필자가 미투데이를 시작한 것이 2008년 7월 4일, 플레이톡에서 미투데이로 옮겨왔다. 인터페이스 적인 측면도 좋았으나, 글을 보는 구조가 편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미투데이에서는 '친구들은' 이라는 페이지를 통해 자기의 이야기를 풀어만 나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글들을 일괄적인 페이지에서 볼 수 있게 하여 편의성을 제공하였다.

 이런 미투데이의 편의성은 리뉴얼 후에 더 확실히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는데, '모아보는'에서는 나의 미투데이 글들에 달린 댓글과 친구들의 미투데이에 달린 글에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에 대한 편의성은 물론이고, 휴대폰과 스마트폰을 이용해서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을 가능케 하였다. 이른바 한국적 정서에 맞다고 해야할까? 한 글에 곧바로 댓글이 달수 있게 하는 시스템은 과거 커뮤니티, 블로그의 방식과 유사하다.
 '마이크로 블로그'로 분류되는 미투데이와 트위터는 전형적인 블로그와는 다르다. 글을 올리고 교류한다는 점은 유사하나 교류의 자유로움이 블로그 처럼 딱딱하지 않다. 마이크로 블로그는 간단하고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라는 특징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서비스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실제로 만나지 않은 사람들끼리 조차도 어떤 내용에 대해서 감정을 터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도 과거 커뮤니티의 특징을 많이 닮아 있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만큼 Formal한 블로그와, 미투데이와 같은 마이크로 블로그이면서 정보의 전달을 더 강조하는 Twitter와 달리, 미투데이는 정보를 전달함과 개인의 감정을 동시에 중요시 한다는 점에서 informal한 툴 인것이다. 실제 내 삶의 친구와 같은 인맥에 관련된 싸이월드의 경우에는 인간관계의 확장이라는 그러한 확장성이 부족하나. 마이크로 블로그의 경우에는 확장성이 강한 편이다. 전혀 실제 세계에서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조차도 정보의 계속적인 교류를 위해 친구신청(미투데이)과 Following(트위터)이 자유로운 편이다. 물론 이 둘 조차도 친구신청의 경우는 상대방이 받아주어야 하지만, Following의 경우에는 정보수신을 중요시하는 트위터의 경우인지라 자유롭다.
 각 SNS의 성격이 다르긴 하지만, 트위터와 달리 우리나라에서 미투데이가 갖는 의미를 생각해보면, 정보의 소통도 물론 중요하지만, 우리 일상의 교류를 조금 더 잘 이루어지게 해줄 수 있었던 미디어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도 미투데이를 사용하면서 계속적으로 지켜보는 사람이 되길 소망한다.

PS. 예전부터 한 번쯤 써보고 싶었던 글이다. 또한 이 포스팅은 계속적으로 내용이 수정될 것 같다. 내가 보기에 아직은 내용적으로 완벽하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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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달폰'이 가지는 이름의 의의

2009/11/25 15:34
아이폰은 왜 '다음달폰'이 될 수 밖에 없었을까

그 실체를 드러낸 iPhone



 아이폰이 예약판매를 하기 시작하기 3일째, 관심은 아이폰쪽으로 제대로 쏠리게 되었다. 아이폰 악세사리 및 아이폰 부가상품에 대한 기대도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국내만 해도 다른 스마트폰들과의 전쟁을 예고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아이폰은 예약판매를 시작한지 조금도 안되어 불나게 팔리고 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아이폰에 대한 이야기도 듣지 못한 사람들 조차도, 이젠 아이폰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다음달폰'이라는 닉네임으로.
 아이폰은 국내에 들어오기까지 많은 고난이 있었다. 처음엔 정부의 정책 때문에 들어오는 것에 곤란함을 느꼈고, 사업자 선정 및 내부 시장 조사 및 들어오는데 시간이 매우 많이 걸린 점이다. 그 새 언론이나 다른 방법을 통해 아이폰과 같은 스마트폰에 대한 모습 및 관심을 얻게 되었고, 아이폰에 관심이 가진 사람이나, 관심이 없던 사람이나 아이폰의 존재에 관해 어느새 알려졌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아이폰은 시장 출시를 계속 미뤄왔었다. 애플의 경우에서도 통신사업자 측에서도, 한국은 시장 조건이 험한 축에 속한다. 이미 무선통신 시장이 크게 벌어졌고, 경쟁해야 할 업체들도 많다. 인구에 비해 경쟁해야할 조건은 다른 나라보다 훨씬 열악했다.
 충분히 생각해보자. 애플이 그렇게 자신 있었다면 아이폰을 시장에 즉석에 내놓을수도 있었다. 하지만 애플은 '장사'를 해야하는 판매를 하는 사람들이였고, 아이폰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수밖에 없었다. 수요층이 기존에 맥이나 아이팟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로 한정을 짓는다면 장사를 하기 힘들어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계속 아이폰은 나올 듯하면서 나오지 않았던 스마트폰이 되어버렸다. 어느새 사람들 사이에서 아이폰은 '다음달폰'이라는 애칭을 달았다. 사람들이 이렇게 애칭을 달고, 루머들 사이로 관심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어느 순간 아이폰은 정식 예고를 해주었다. 아마 '다음달폰'은 '아이폰'으로 돌아왔지만, 그 이름의 의미는 클 것이다.
 당기고 빼는 전술이 어떻게 보면 언론을 통해서 사람을 유혹하고, 사람들 사이로 관심을 일으키는 하나의 수단이 될수도 있지만, 이것은 비단 나의 애플의 태도를 보았을 때 예측한 것이므로, 실상은 KT와 애플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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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을 강조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2009/09/05 01:17

개각 이전의 MB 정부의 태도 및 평가


 취임 1년 반만에 MB 정부는 정부의 핵심이 되는 인사들을 교체하는 개각을 진행했고, 진행 과정을 '혁신', '중용', '탕평'과 같은 말을 강조하는 것에 치중했다. 분명 취임 초기의 '강부자' 내각은 비판받을 소지가 다분했고, 대선, 그리고 취임 이후 계속 강조해왔던 경제는 경제에 대한 정책 수립, 정책 수행 능력에 대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분명 전 세계적인 경제 위기는 정부의 경제 정책에도 반영 되었겠지만, 하지만 기본적인 정책 수행 능력이나, 경제를 이끌어나갈 지휘자는 방향을 잃고 표류하기 바빴다. 그리고 그 지휘자를 감싸고 돈 것은 대통령이다.
 자기가 선택한 지휘자의 능력에 대한 국민 여론, 그리고 전문가의 비판을 계속 받아옴에도 불구하고, 의견이 모아진 상태에서 경제 플랜은 수립되지 못한 점과 그것을 실천하려는 노력은 단지 피상적이였기에, 이것이 바로 정부의 폐쇄적인 성격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일각에서 계속 제기해왔던 '소통'의 문제도 거기에서 기인한다. 이것은 경제 뿐만이 아니다. 경제는 물론이고 언론, 집회와 결사의 자유, 인터넷 언론 까지, 자신의 정책에 해가 되는 존재들을 없애려는 배타적인 태도는 정책, 실제 진압 현장, 그리고 통제로까지 나타났다.
 '언론 악법'이라고 총칭되는 법들은 '직권 상정'이라는 한 쪽의 강압에 의해 통과 되었으며, 권세 있는 자들은 계속 권세를 누리게 되는 세상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국민들은 태도가 전혀 바뀌지 않은 정부의 모습에 실망하고, 신뢰하지 않은지 이미 오래다. 분명 대통령 부터 의식의 개혁이 필요한 상황이였다. 그러지 않고서는 지금의 정부는 더 이상 국민과는 손 끊고 혼자 놀겠다는 심보이기 때문이다.



정운찬씨의 기용, 무언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무엇을 하면 국민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을까 하니, 그것은 바로 누구나 환영할 말인 '혁신'이라는 인사 기용이다. 정운찬씨의 후보자 발표 이후 많은 언론사에서 나온 말은 '비판자의 기용', '진보 인사 기용', 등 정부의 기조 변화를 언급하는 글들이 다분했다.
 정부의 태도 변화는 국민의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다는 계산이다. 여태까지 정부의 정책과 다른 노선을 가진 인사를 기용함으로서, 정부가 가진 폐쇄적인 이미지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탕평', '비판적 인사'의 기용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이것은 알고 있어야 한다. 정부의 행정의 기본적인 노선을 담당했던 것은 대통령이고, 지금은 세부적 사항까지 건드리는 상황이다. 정운찬씨도 이것을 분명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 노선도, 거대 권력 앞에서 무너지는 것을 많은 경우에서 볼 수 있었듯이, 자신이 국무총리로서 정부 제 2의 권력자라고 하더라도, 자기를 기용해준 대통령에게 예전과 같이 그렇게 비판할 수 있을지 말이다. 물론 본인도 정책에 직접 참여하는 정도는 크지만, 지금 구조가 대통령에게 쏠려 있는 상황에서 과연 어떻게 나올지 걱정된다.
 결국 정운찬씨의 기용은 '전 서울대 총장', '진보적 인사', 'MB 정부의 비판자' 의 수식어를 가지고 혜성처럼 등장한, 개각의 얼굴 마담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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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남겨진 숙제

2008/10/12 03:06
개별의 사람들이 스스로 남긴 숙제

 우리는 우리 스스로, 만물의 영장으로서 자처하며 살고 있으면서도, 그 지위를 이용하여 주위의 있는 다른 동물들을 부리고, 생태계를 함부로 조절하여 균형을 망가뜨린다. 스스로는 '지구(영어로는 Mother Earth)'를 소중히 여기면서, 이면으로는 삼림 파괴나, 수질 오염등의 자연파괴를 한다. 그러면서, 정작 열대 우림이 사라지면서 지구가 아파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지구는 지적 능력을 가진 생명체가 아니다. 결국 자연 파괴등의 밸런스 파괴로 인하여 재난이 닥치는 것은 인간들과 지구상에 존재하는 죄 없는 생물들 뿐이다.
 우리는 항상 우리가 한 일에 대해서 숙제를 남길지도 모른다. 그것이 단기적이든 장기적이든, 우리는 우리의 일에 관해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 반성하고 항상 기억하고, 그래서 일생을 바꾸어 나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과거와 현재를 제대로 직시하고, 느껴야 하는 것이다.

인간 관계에 의한 숙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들 칭한다. 관계를 맺는 가운데에서 지적 교류와 감성적인 교류를 함께한다. 단순히 교류라는 것이 개인만을 강조하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교류이다. 정보의 일방적인 전달 처럼, 자신만의 고집과 아집이 인간 관계를 흐트려놓는 것이 아닌지 경계해야만 하는 것이다. 인터넷은 이러한 피상적인 공간에서 인간 관계를 맺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우리는 피상적인 공간안이란 것이, 실제로 대면하지 않는 공간이라는 말과 동치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다만, 말과 감성을 문자화(텍스트) 했다는 점에서, 말투라는 것이 결국 실제로 대면해서 말하는 느낌을 받게 하는 것일 뿐이다.
 결국에는 진심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 말이 가지고 있는 어감 때문에 고생하는 것이다.
인터넷 상에는 자신의 말을 기술 할 때도 하나 하나 점검해야 하는것이다.
 이러한 한계를 느끼면서도,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피상적인 관계를 맺고 산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기에 그런 것일까.

사회 단체, 정치, 우리의 권리와 관련한 숙제

 우리는 수많은 관계를 맺고 살아가며, 결국 관계의 복잡성 때문에 사회가 형성될 수 있었다. 단순화 된 사회 공동체에서는, 의사 결정 수단이 그렇게 복잡하지 않았지만, 지금의 사회는 너무나 복잡한 유기체 같이 이루어져 있다. 결국 의사 결정, 전달 수단은 결국 정치적 대리인에 맏기게 되는데,,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당연히 행사하면서도, 항상 후회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임기 기간 내내, 결국 정책은 정당의 색깔, 정당간의 신경전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다, 정작 국민이 원하는 것은 이루어지는 것이 잘 없게 된다.
 우리의 권리는 단지 투표장에 가서 찍고 나와 '나 투표했어, 민주 시민으로서 난 내 권리를 다한거야' 라고 해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터넷에서나 일상에서나, 우리는 항상 잘못을 저지르는 정치인에 대해 비판하고 혹은 비난도 하긴 하지만, 정작 비난과 비판을 받은 정치인은 변화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만큼 정치인의 활동에 관해 블라인드 되어 있다는 점에서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특히나 정당의 목소리가 국민의 목소리보다 더 크다는 점이며, 입법부나 사법부나 행정부의 힘이 개별 국민이 가지고 있는 권리를 다 합쳐도 투표 때나 감사 때나 잠시 그들의 힘이 약해질 뿐, 그 시기가 지나면, 지금의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권리로서는 한계를 느끼게 된다.
 과거 군부 독재 시절에서는 민주주의를 획득하기 위해 '현실 참여'를 했지만, 지금은 단지 권리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제대로 이행이나, 실현이 가능한 세상이라고 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우리는 단지 투표와 사람을 선출하기 위해서 민주주의를 바란 것이 아니다. 또한 대다수의 국민들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런 점에서 행정부에게 쏟아지는 질타나 비판을 행정부가 제대로 인식하고 알아갔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눈 가리고 귀를 막는다고 해서 나중에 모르게 되는 것이 아닌 세상이 지금이다. 미래나, 후대의 기록에서 당신들의 오점들이 선명하게 남을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제대로 된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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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집단 린치 - 현실에서의 집단 린치와 인터넷에서의 집단린치를 비교, 실제 사회에서의 비교

 집단 린치는 사회가 형성되고 집단이 형성되면서 자동으로 따라오는 폐혜중 하나이다. 아래 그림은 오하마에서의 집단 린치 후 화형을 하는 사진이다. 현실에서의 집단 린치는 곧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주류에서 벗어난 소외받은 사람들이나 기피하는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처리, 제거하기 위한 하나의 대응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래 사진과 같이 잔혹한 파괴성과 인간성의 부재를 낳았다.

오하마에서의 집단 린치 후 화형 장면


 집단 린치는 비단 현실에서만 적용되는 문제가 아니다. 사회가 형성되고 집단이 있는 어느 곳에서나 집단 린치는 존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이 다른 이름으로 불리어져울 뿐이다. 가령 학교에서는 '왕따(Bullying)' 라는 이름으로 바뀌어져 불릴 뿐이다.
 하물며 인터넷이라는 공간도 작은 단위의 사회 집단들이 모여 만들어진 사회 집단의 하나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또한 집단 린치가 존재하게 된다.
 인터넷에서의 집단 린치를 가상 폭력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는 데, 다음 표와 같이 특징을 요약 할 수 있다.




 종류  현실 폭력
가상 폭력





피의자 대상  집단 내
불특정 다수





 영향 육체적 피해, 정신적 피해
심지어 과거에는 살인도 동반
 우울증, 자괴감 동반





 후유증 육체적, 정신적
정신적 피해



 위의 표에서 보실 수 있다시피, 현실에서의 집단 린치는 육체적 피해와 정신적 피해, 그리고 즉각적인 효력을 불러 일으키고, 전시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인터넷에서의 집단 린치는 과거와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데, 피해자와 관련이 없는 불특정 다수가 피해자를 인신 공격함으로서, 피해자가 정신적인 피해를 입는 것을 말한다. 이 때 피해자는 우울증과 자괴감을 동반하는 정신 질환에 걸리기 쉬우며, 극복 하더라도 정신적 피해를 동반하므로, 집단에 의한 인간 살인이라고 해도 문제가 없는 것이다.

 과거의 심각한 집단 린치의 예로서 KKK를 들 수 있는데, 미국 사회 내에서 인종의 차별로 인해 무참히 살해된 흑인들은 집단 린치를 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KKK가 일으킨 오하이오 집단 린치에 대한 만평


 하지만 미국과 달리 한국에서는 인종의 차이, 사회 구조상의 갈등이라고는 볼 수 없는 다른 문제이다. 바로 국민성에 잠재되어 있는, '실제로, 겉으로는 표현을 못하지만, 그 사람이 없으면 얼마든지 비난을 가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정의 내려보자면 '숨겨진 비난'이라는 것이다.
 이들에게 인터넷의 익명성은 그들이 가진 '숨겨진 비난'에 대해 무한한 자유를 제공했다. 이들은 방종에 가까운 행동으로 '악플'이라는 사회적 현상으로 까지 부각 되었다. 이러한 인터넷 집단 린치는 유명인에서 부터 소외 계층까지, 다방면으로, 그것이 강하고, 이슈가 될 수록, 특히 가십거리에 벌 떼같이 달려들어 당사자를 물어 뜯는 경향이 있다.

국회와 정부가 가지고 있는 오류에 대하여 - 실명제는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다.

 국회와 정부는 요즘에 상황에 대하여 더 넓은 범위에서 실명제를 하려고 계획하고 있다. 이는 근본적인 오류 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국민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든 '실명제로 어떻게 국민을 통제 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 할 수 있겠지만, 주민 등록법이 제정 되었을 때, 그 때 또한 국민을 통제하기 위해 겉으로는 '조선의 호패법의 우수한 장점을 이어받아~'라고 감언이설을 하면서, 주민 등록법을 통해 국민을 관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실명제는 인터넷의 고유 속성인 '익명성'을 제거함으로서, 현실에서의 구속을 인터넷에서 까지 그대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다.
 또한 표현의 자유는 구속에서 나올 수 없다. 그 대표적인 예로 중국의 웹 상황을 볼 수 있는데, 反정치 이념을 가지고 있는 네티즌을 수감시키는가 하면, 인터넷 통제를 통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 집단 린치는 익명성에서 나오기는 하지만, 기초적인 시민 교육의 부재로도 나타난다. 실제적으로 도덕이나 윤리 교과서에서는 인터넷 윤리를 단순히 '~이러면 안됩니다.'라는 가벼운 문구로 수박 겉핥기 식으로 넘어가는 경향이 적지 않아 있는데, 이것은 문제이다. 실제적인 예를 들면서 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이다.
 마지막으로 인터넷 실명제를 찬성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큰 집단에서 작은 집단을 자율적으로 통솔, 혹은 지도를 할 수 없냐는 것인데, 큰 집단의 사람들이 작은 집단인 KKK를 관리, 근절해서 민주적인 환경을 만들어낸 미국의 예를 볼 수 있듯이, 자체 근절을 통한 인터넷 집단 린치를 근절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또한 실명제를 통한 통제는 말 그대로 민주적이라고도 볼 수 없다. 통제는 민주적인 방법에 의한 것이 아니며, 어느 누군가의 막강한 권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Big Brother'를 양산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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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 인격체, 그리고 블로거

2008/07/05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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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이라는 가상현실에서 까지 현실의 사상, 인격체를 논한다는 것의 문제

 20세기 이후, 광통신망의 빠른 보급으로 사람들은 더욱 쉽게 인터넷을 접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논할 수 있는 광범위한 장이 되었다. 하지만 빠른 보급과 익명성은 가상현실의 본위를 훼손하기 시작했다. 욕설과 비방은 기본이고, 또한 사회 이슈로 부각되어 시끄럽게 한 '악플'까지. 정작 현실에서는 가면을 쓴 것 같은 자신들의 인격들이 인터넷이라는 장벽없는 세상에서는 또 다른 인격체로 만나게 된다.
 또한 또 다른 인격체가 만들어 놓은 사회는 온라인이 아닌 오프라인에서 조차 자신의 다른 인격으로 사람들을 대할 수 있다. 그것은 곧 자기가 만들어 놓은 하나의 이미지(image)인 것이다.
 즉 블로거 자신 조차도 결국 인간이 만든 하나의 인격체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 이 또 다른 자아를 넘어서는 개념으로서, 상황에 따라 자아가 변할 수 있는 자아 즉 'I-ego(아이-에고)'라고 칭할려고 한다. 'Interaction-Ego'의 약자로서, 상황과 자신의 선택에 따라 새로 생성되는 자아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에 있어서 I-ego는 본래의 자아의 장벽을 없애고, 새로운 자아를 탄생 시켜줄 수 있는 존재이다. 곧 I-ego는 상황적 변인이 존재한다. 장벽이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 따라 지금 우리가 현실적인 자아와 인터넷에 있어서의 자아를 독립적으로 분리시켜준다.
 결국 언론인이 블로거가 된다는 것은 I-ego에 의해 또 다른 자아를 인터넷 세상에 생성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곧 기자라는 현실 대신, 블로거라는 객체로 돌아가게 된다. 물론 사람들은 기자라는 그 본위 자체에 사상이나 생각을 버리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본인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I-ego 자체는 상황에 의해 생성된다. 즉 본인이 선택함에 있어 자아의 성격이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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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현실의 자아는 성장과정, 사회의 성격에 따라, 그 본위에 관계 없이 생성된 존재이다. 결국 가상 인격체를 실제 인격체랑 완벽히 연관지어 판단한다는 것은 오류가 존재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상 인격체의 인격을 결정하는 것은 I-ego의 역할이다. 결국은 가상 현실의 인격의 사상과 판단은 전적으로 현실 자아에서의 사상과 판단을 그대로 적용 시키기에는 무리인 것이다. 왜냐하면 가상 현실이라는 자아와 현실이라는 자아라는 것은 I-ego가 만들어낸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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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안타깝다

2008/06/30 23:46
You are a

Social Moderate
(50% permissive)

and an...

Economic Liberal
(35% permissive)

You are best described as a:

Centrist

Link: The Politics Test on Ok Cupid
Also : The OkCupid Dating Persona Test

위에서도 보셨듯이 저의 정치적 성향은 중립적임을 알려드리며....

현실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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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 원수의 잘못된 결정과 폐쇄적인 국정 운영으로 인해 국민들은 더욱 더 노여움에 잠겼다. 그리고 그 노여움의 결과로 시위로 이어졌다. 물론 과격 시위는 그 노여움의 과도한 표현임에 틀림없다. 법적으로는 저촉될 지는 몰라도, 그들의 불안함은 폭력으로 이어질 소지는 충분했다.
 정부는 단지 '소통의 부재'만을 생각했다. 그것은 완전 잘못된 생각이었다. 물론 국민들이 '소통이 안되는 대통령, 정부'라고 비판을 한 결과도 있었지만, 정부는 너무 국민들의 정서에 안이하게 대처했다. 시위가 가지는 의미를 고려하지 않고, 요구를 들어볼 생각을 처음에는 하지 않았다. 살수차나 소화기를 이용한 대처는 구 시대적인 발상이었다. 이전에는 단순히 언론으로만, 입소문으로만 전파될 수 있었는지는 몰라도, 광통신기술이 보급된 현재에는 순식간에 전파된다. 이것은 국민들의 분노만 증가시켜 잠정적으로 시위 참가자를 늘리게 한 결과가 되었다.
 시위는 잠정적으로 국가의 모든 것이 분명하지 않게 보였다. 국정 전반이 모두 허술한 것으로 보여지게 되었다. 정책에 대한 대처나 중요한 인사 발령까지, 현재 정부는 장차 그들의 국정을 평가해 줄, 역사로서 인정해 줄 세대를 깡그리 무시했다.
 국민들은 '강부자'나 '고소영'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겉으로는 '부자들은 다 그래, 서민들은 생각해 주지 않아'라는 표현을 한다. 하지만 그들이 국정을 제대로 운영해주고, 서민들의 삶을 보장해주었다면 곧 사그라들었을 문제였다. 하지만 국민들은 곧 실망했다. 그들은 진정으로 서민들을 위한 존재는 아니었다. 정부는 인사를 다시 바꾸었다. '명세빈'이라는 말 아래 말이다. 처음 이 단어를 접했을 때 헛웃음만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 인재 대신에 국민의 원성을 잠시 잠재울 만한 그런 인사코드를 내세우는 그런 행보는 잘못된 것이다.
 국가는 지금 혼란한 상태다. 외부로는 원자재값 인상으로 인한 가격 인상 내부적으로는 촛불 집회와 반 촛불 집회 그리고 국정 혼란, 모든 것이 암울한 상황이다.

민주 사회에서는 자유를 침해하는 것 이상 무서운 것이 없다.

 민주 사회에서 집회, 시위는 빈번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고통을 겪지 않은 존재는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정체되기 때문이다. 최근에 정부가 바라보는 촛불 시위는 그러한 자유를 침해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시민들 중에서는 이러한 시위는 자유를 뛰어넘어 방종이라고 보는 시각은 있을 지 모르나, 대부분 시민들의 의도는 자발적이며, 그들은 법을 준수하면서 시위를 한다. 일부 폭력 시위는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부분을 크게 부풀리는 침소공대하는 이러한 자세는 거대 언론에서나 정부에서나 국민들의 자유권을 침해하는 것에 불과하다.
 지금의 정부의 태도는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다. 민주 사회를 이끌어 갈 지도자들이 국민의 안전과 자유를 보장해 주지 못하는 그들의 자세는 과연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함일까. 아니면 국민을 받들어 모시겠다는 의지는 약해진 것인지, 의심만 해볼 따름이다.

정부는 각성해야 한다.

 과연 정부는 국민을 받드는 존재인지 묻고 싶다. 과연 시위를 반정부 쿠테타로 생각하는 그들의 뇌 속이 궁금할 따름이며, 정부 출범하지 얼마 되지 않아 이러한 말썽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그들의 정국 운영에 기인하지 않는가. 건드리지 않는데 시위를 하지 않는다. 믿고 맡겨준 권력을 그렇게 아무렇게, 그리고 권력을 준 국민을 기만하는 태도는 무례하기 짝이 없다.
 정부는 이제부터라도 생각을 다시 하여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 정부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바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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